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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에로 소설이 베스트셀러인 이유

발행일자 : 2012-06-28
나는 로맨스소설을 읽지 않기 때문에 이엘 제임스의 ‘회색’ 삼부작 열풍이 불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새로운 인기 하위장르인 에로틱 로맨스 또는 로맨티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회색 삼부작 1권 ‘회색의 심연’을 읽은 후 내가 이해가 가지 않았던 점은 억만장자이고 엄청 잘 생기기는 했지만 여자친구를 벨트로 때리는 데서 성적인 쾌감을 느끼는 남자주인공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성인이 합의를 통해 지배하고 복종하는 관계를 맺는 ‘회색의 심연’은 로맨티카의 하위장르인 BDSM(결박/규율/가학/피학)에 속한다. “워싱턴주에서 가장 부유하며 수수께기로 가득한 독신남”인 남자주인공 크리스찬 그레이가 지배하는 역할이고 대학을 갓 졸업한 여자주인공 아나스타샤 스틸이 복종하는 역할이다. 내성적이고 순진하며 덤벙거린다고 자신을 묘사하는 아나스타샤는 다른 사람이면 욕설을 하는 상황에서도 “세상에”라고 말하는 게 전부일 정도로 얌전하다. 크리스찬이 생각하듯 몸매가 좋은지는 모르지만, 머리가 별로 안 좋은 인물이기도 하다. 컴퓨터나 이메일주소 없이 4년 동안 대학을 다녔다는 내용도 나온다.

이용자를 보호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회색의 심연’ 19권을 일시적으로 치운 플로리다의 도서관과는 달리 나는 여성이 묶여서 맞는 내용에 대한 책을 읽고 싶다면 남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회색 시리즈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여성이 복종이라는 환상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어떤 문화적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성상담치료사인 새리 쿠퍼는 ‘사이콜로지 투데이’에 기고한 글에서 남성과 여성이 지배하거나 복종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현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과거에도 이러한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밝혔다. 일례로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1870년작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는 여성에게 지배 받고 싶어하는 남자주인공이 나온다(연극으로도 각색되어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이다). 새리 쿠퍼는 사회정치적 관점으로 ‘회색의 심연’을 분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성인관계의 한 종류”일 뿐이며 환상에서만 이루어질 때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당한 지적이다. 그러나 현대여성이 겉만 그럴 듯한 인물인 크리스찬 그레이에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심히 걱정되는 사실이다. 멋진 머리카락에 몸매도 탄탄하지만 자기 얘기만 하는 인물이다. 영화나 술집, 헬스장에 가지 않고 TV도 보지 않으며 책도 안 읽고 시사문제에 대해 토론하지도 않는다. 친구도 없다. 피아노를 치기는 하지만 “구슬픈 음악”만 연주한다. 아나스타샤가 유년기에 대한 질문을 하자 그는 어머니가 “마약을 하는 창녀”였다고 답한다.

문화비평가와 심리학자들은 회색 시리즈가 미국에서만 1천만 권이 판매된 이유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다. 남성이 침실에서 주도권을 잡기를 바라는 여성에게 어필했다는 지적도 있다. 1973년 ‘사이콜로지 투데이’에 실린 기사에서 바바라 해리튼은 “강압” 환상이 거절이나 학대에 대한 것이 아니며, 스스로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주도적이고 독립적인 여성들”이 많이 갖는 환상이라고 결론지었다. 회색 시리즈가 여성이 부끄러움 없이 성적 욕망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말하는 심리학자도 있다.

여성을 위한 에로티카 장르에 속한 도서가 수천 권이나 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중 몇 권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006년 신작출판을 중단한 영국의 에로티카 출판사 블랙레이스는 16년 동안 전세계에서 ‘바바리언과 게이샤’ 등 4백만 권 이상의 소설을 판매했다. 미국의 로맨티카 출판사 엘로라 케이브는 “노골적인 표현으로 생생하게 묘사된 베드신이 가득 담긴” 책만 출판한다고 밝히고 있다.

회색 시리즈가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기는 하지만, 아마존 독자 1,700명 이상은 회색 시리즈에 최악의 평점인 별 하나를 주었다(별 다섯 개를 매긴 독자 수는 2,500명이다). 혹평에서 눈에 띄는 점은 독자들이 미디어에 속았다고 크게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완전 속았다”나 “언론에서 하도 난리를 쳐서 샀는데 후회한다”, “직장동료들이 칭찬을 늘어놓아서 읽었는데 이제는 직장동료들도 안 좋게 보인다”는 평이 올라와 있다.

‘회색의 심연’ 때문에 오늘날 독자들의 문학적 안목이 낮아졌다고 좌절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질이 낮은 베스트셀러는 항상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1969년에 언론인들은 미국문화를 조롱하려는 목적으로 팀을 짜서 페넬로페 애쉬라는 가명으로 베드신이 많이 들어간 형편없는 책인 ‘네이키드 케임 스트레인저’를 출간했다. 당시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이 책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회색의 심연’의 높은 인기에 우려할 필요가 없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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